요즘 한국에서는 노동 개혁이 뜨거운 감자입니다. 특히 노동 시간 개편에 대해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죠. 적절한 노동 시간이 도대체 몇 시간인가에 대한 논의는 단순히 숫자에 대한 합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노동의 목적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우리 사회에 반문하고 있죠. 노동의 목적을 개인, 회사, 국가의 차원에서 몇 가지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인의 행복한 삶을 위한 노동, 개인의 업무적 발전을 위한 노동, 회사의 유지를 위한 노동, 회사의 매출 확대를 위한 노동,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한 노동,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노동 등. 그 외에도 수많은 노동의 목적 중에서 대체 무엇을 위해 노동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선행될 때, 그 목적에 맞는 노동 시간과 그 시간에 대한 근거를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피로사회』에서 제시한 21세기 현대 사회의 특징 및 현대적 의미의 노동에 대한 관점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시사점을 던지는 듯합니다.
현대사회=성과사회
『피로사회』는 현대 사회를 "성과사회"로 규정지으며, "규율사회"였던 근대와 구분합니다. 규율사회는 다름에 대한 관용이 없으며, 자아와 타자 사이에 뚜렷한 경계를 만듭니다. 여기서 타자는 자아에 바이러스적으로 침입하고, 자아는 타자에 대해 부정에 기반한 면역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이렇듯 이질적인 것이 침투해 자아에 혼란을 주는 것을 '부정성의 폭력'으로 정의하며, 여기서 '다름'은 소멸되어야 하는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반면 현대 사회인 성과사회에서는 다름(이질성, 타자성)을 용인합니다. 즉, 근대 규율사회가 부정의 시대였다면, 현대 성과사회는 긍정의 시대인 셈이죠. 긍정의 시대에는 '긍정성의 폭력'이 있습니다. 긍정성의 폭력은 동질적인 것의 과잉, 즉 같은 것의 과다를 통해 폭력에 대한 개인의 능동적인 참여를 이끌어냅니다. 따라서 현대 사회에서의 개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맹목적인 노동의 쳇바퀴 위에 올려놓고 고갈시키는 자기 착취를 시작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더 이상 외부의 시스템이 개인에게 성과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Yes, we can!"이라는 캐치프레이즈의 반복만으로도 사회는 손쉽게 개인 스스로를 성과의 주체로 만들어 착취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피로사회』에 따르면, "사회적 무의식 속에는 분명 생산을 최대화하고자 열망이 숨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회는 개인을 성과의 주체로 만들어 노동의 쳇바퀴 위에 올려놓고는, 그 어떠한 후속 조치나 판단을 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긍정의 폭력 시스템 속에서는 사회가 개인을 성과의 주체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회가 형성한 과잉 긍정을 받아들인 개인이 스스로를 성과의 주체로 만듭니다.) 이러한 지배 없는 착취는 능동적으로 시작된 활동적 삶을 치명적인 수동성으로 귀결시키는 역설을 낳습니다. 그것을 『피로사회』는 활동성의 변증법이라고 정의합니다. 활동성의 변증법을 설명한 책의 한 구절 인용하겠습니다.
활동성이 첨예화되어 활동과잉으로 치달으면 이는 도리어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으로 전도되고 만다는 것이 바로 활동성의 변증법이다. 그것은 자유 대신 새로운 구속을 낳는다. 더 활동적일수록 더 자유로워질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피로사회』, 48p.)
성과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한 비판
『피로사회』에서는 성과사회에서의 자기착취적 노동이 개인을 파멸로 몰고갈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성과사회는 모든 개인에 대해 활동성의 과잉을 요구합니다. 활동성의 과잉은 사유의 부재와 피로 의 깊은 구렁텅이로 개인을 몰아넣습니다. 그리고 사유의 부재와 피로는 개인을 아무 저항 없이 모든 자극과 충동에 순종하는 과잉수동성(『피로사회』, 48p.)으로 전도시킵니다. 사유의 부재와 피로는 또한 개인을 이 시스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무력화합니다. 먼저, 사유의 부재는 개인으로부터 사색을 박탈합니다. 사색은 과잉 주의와 반대됩니다.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정보에 대한 빠른 판단을 요하는 과잉 주의와는 달리, 깊은 생각과 주의를 요하는 사색은 '심심함'을 수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잉 활동의 주체인 개인은 사색하는 능력을 잃어버립니다. 과잉 활동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빠른 정보 흡수와 판단이 필요한 과잉 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사색하는 능력의 상실은 곧 철학적 사유의 부재로 이어져, 옳고 그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등에 대한 주체적 판단이 불가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상태에 빠진 개인은 사회가 '긍정'하는 자기착취가 과연 옳은 것인지를 고민할 수도, 판단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기착취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피로사회』, 66p.)
다음으로, 피로는 개인을 고립시켜 자기 스스로와 사회를 비판적으로 보지 못하도록 합니다. 『피로사회』는 성과사회의 피로를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이며, 피로는 사람들로부터 친밀감을 박탈하고, 사람들을 이어주는 언어를 파괴하여 공동체와 삶을 파괴하는 데 이른다고 말합니다. 즉, 피로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는다는 것이죠. 여기서 저자 한병철 교수는 페터 한트케의 『피로에 대한 시론』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나는 너한테 지쳤어’라는 말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함께 외쳤다면 우리는 각자의 동굴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 종류의 피로는, 본래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아무 말 없이, 필연적으로 폭력을 낳았다. 아마도 이러한 폭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직 타자를 일그러뜨리는 시선 속에서뿐이었을 것이다.”
정리해서, 『피로사회』에 따르면 성과사회가 개인의 노동을 맹목적이고 수동적으로 변화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사회 속에서 노동하는 개인은 사유의 부재와 피로로 말미암아 자기착취의 연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제언
『피로사회』는 긍정의 폭력이 만연한 성과사회에서 인간성을 회복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부정'을 차용할 것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부정은 규율사회의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저자가 제안하는 부정이란 긍정의 사회에서 쏟아내는 과잉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무위에 가깝습니다. 무위는 심심함, 놀이, 피로로서 구체화됩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채움이 아닌 '비움'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시간은 무(無)의 시간입니다. 이는 무엇을 넣어 무엇을 얻어낼 것인지를 계산해,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생산적인 시간을 보내라고 요구하는 사회적 '긍정'과 반대되는 '부정'의 시간입니다. 어떠한 효율도 따질 필요 없이 흐르는 대로 존재하며 보고자 하는 것에 집중하여 빠져드는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인해 심심한 상태 대한 불안을 내려놓고 진정으로 심심한 상태에 존재하는 것, 생산이 아닌 순수한 즐거움을 즐기며 함께 노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모두, 긍정의 과잉으로 개인을 침잠시키려는 사회 속에서 개인이 인간성을 지키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부정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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