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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영화] 84번가의 연인 (1986) | 내 인생의 따듯함이었던 친구여, 안녕히!

by 김서울 Seoul Kim 2023.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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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번가의 연인 (1986)

 

 
심하게 건조하던 몇 달을 지나, 그토록 기다렸던 비가 내리는 요즘입니다. 심하게 건조한 날씨로 인해 매일같이 휴대폰 재난 문자가 오고, 뉴스에선 온갖 화재 사건으로 인한 피해가 보도되고 있었기에 어제 오늘 내리는 비가 더욱 반갑게 느껴집니다. 이런 날이면 그저 마음이 따듯해지고 행복해지는 영화가 생각나는데요. 그래서 오늘은 데이빗 휴 존스 감독의 1986년 영화 <84번가의 연인>을 리뷰하려 합니다. 데이빗 휴 존스 감독은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상처뿐인 훈장>(1989)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은 바 있습니다. 보통 고전 영화는 왓챠에서 찾아서 보는 편인데, <84번가의 연인>은 넷플릭스에만 업데이트되어 있습니다. <84번가의 연인>의 원제는 <84 Charing Cross Road>로, 영화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 런던 고서점의 주소를 의미합니다. 화려함이나 심장을 쫄깃하게 만드는 날 선 갈등은 없지만, 그 어떤 영화보다 사람의 마음 깊은 한 구석에 큰 울림을 주는 영화, <84번가의 연인>의 줄거리와 감상 및 추천사 살펴보겠습니다.
 

 

줄거리

 

 
영화는 1949년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레인 헨프(앤 벤크로프트 분)를 비추며 시작됩니다. 직업이 작가인 만큼, 그녀의 취미는 독서입니다. 일반 서적보다는 고전을 찾고, 현대판 제본보다는 크림색 종이의 고서적 제본을 더욱 선호하죠. 하지만 뉴욕에는 그녀가 원하는 책들이 충분히 없을 뿐더러, 있더라도 너무 비싼 가격에 구매할 수가 없습니다. 잔뜩 심통이 난 헬레인은 서점 주인에게 "뉴욕에서는 아무도 영문학을 안 읽나보죠?"라며 괜히 핀잔을 줍니다.
 

 
헬레인은 어느 날, 영국의 한 서점에서 고서적을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는 안내문을 보게 됩니다. 마크스 상회에서 운영하는 고서점으로, 런던 채링 크로스 84번가에 위치해 있었죠. 헬레인은 그 즉시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자신이 찾는 책들이 있는지 편지를 보냅니다. "제가 찾는 책들의 목록을 동봉합니다. 이 책들 중 5달러 미만의 책들이 있다면, 이 편지를 주문서로 여겨주시고 동봉하여 보내주세요."
 

 
마크스 서점의 대표였던 프랭크 도엘(앤서니 홉킨스 분)은 헬레인의 편지를 받고, 서점에 있는 책들을 포장하여 편지와 함께 회신합니다. 지금 서점에 없는 책들은 나중에라도 구해서 주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죠. 그때부터 헬레인과 프랭크는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합니다. 이젠 마크스 서점에서 일하는 4명의 직원들도 헬레인과 편지를 직접 주고받곤 합니다. 마크스 서점에서 일하는 직원들 모두와 헬레인은 편지를 통해 단순한 책 주문 내용만이 아니라 책에 대한 감상, 서로에 대한 안부, 가족에 대한 애정, 사회적인 이슈,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까지도 나누기 시작합니다.
 

 
종이 몇 장을 통해서도 서로에 대한 배려와 진심을 전할 수 있던 시절.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고, 다른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마크스 서점 직원 일동과 헬레인 간의 우정과 신뢰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돈독해졌습니다. 하루는 헬레인에게 전화가 걸려옵니다. 방송사에서 TV 프로그램 각본가로 그녀와 계약을 하고 싶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죠. 헬레인은 한 회차당 200달러를 받기로 하고, 알뜰히 저축해 영국으로 건너가 마크스 서점에 방문할 가슴 벅찬 계획을 세웁니다. 과연 헬레인은 그녀의 인생을 환하게 밝혀준 마크스 서점과, 마크스 서점 직원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녀의 인생 한 켠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준 프랭크와, 그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영화 <84번가의 연인>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상 및 추천사

 

 
책과 편지를 매개로 한 로맨스에는 어떠한 특별함이 깃들어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과 글을 읽는 사람의 시간이 일치하지 않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소개할 땐 서로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책과 편지는 시공간의 차이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의사소통 수단이기에, 그 수단 너머에 있는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있어서 조급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강요가 통하지 않으며, 상대에 의해 내 생각이 매몰되지 않으며, 서로에 대한 존중과 이해가 기반이 되는 관계. 책과 편지를 통한 로맨스의 이러한 특징은 수많은 영화들에서도 다뤄져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설효로 감독, 탕웨이 주연의 2014년 영화 <북 오브 러브>가 떠오릅니다. 이 영화 역시 심각하고 복잡한 갈등이나 사건은 없지만 탕웨이의 사랑스러움과 깨알 유머 코드들이 매력적인, 가볍고도 즐겁게 보기 좋은 잔잔한 편지와 책 소재의 로맨스 영화입니다. <84번가의 연인>을 재밌게 보셨다면, <북 오브 러브>도 취향에 맞으실 것 같습니다.
 

 
책과 펴지를 매개로 한 사람들 사이의 우정과 유대감을 그려낸 영화 <84번가의 연인>. 이 영화는 첨예한 긴장으로부터 오는 스릴과 그것이 해소되면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를 좋아하는 분들에게는 크게 어필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화의 플롯이라고 한다면, 그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간의 우정이 담긴 편지의 주고받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또한 1949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의 시대 흐름을 따라갑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즉위식, 처칠의 당선, 미국 선거 운동에서의 흑인 시위 등 미국과 영국의 사회 모습을 편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줍니다. 이렇게 평범한 삶 속에서도, 성별, 국적, 정치, 이념 등 모든 것을 초월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려 노력했던 추억은, 마크스 서점 직원들과 헬레인의 마음 속에 깊게 뿌리내린 따스한 빛과도 같았습니다.
 

 
비가 와서 쌀쌀해진 요즘, 따뜻한 코코아 한 잔과 함께 잔잔하고 힐링되는 사람 냄새 나는 영화 <84번가의 연인> 보시면서 휴식을 취하시는 건 어떨까요? 건조함으로 인한 산불을 꺼 주고 있는 고마운 봄비와 같이, 마음에 따뜻한 위안을 주는 영화입니다. 고전 영화 특유의 뉴욕 재즈 음악과 노란 조명이 그 따뜻함을 더해주고, 힘든 삶 속에서도 명랑함과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잃지 않는, 보는 사람까지 웃음을 짓게 만들어주는 헬레인 역의 엔 벤크로프트의 연기, 앤서니 홉킨스의 젊은 시절과 그가 하는 깨알 아재 개그까지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다양한 고전 문학이 인용되는데, 그중에서도 <84번가의 연인>과 가장 잘 어울리는 존 던의 인용구 하나 남기면서 오늘의 포스팅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든 인류는 한 권의 책과 같아서
한 사람이 죽었다고 그 장 전체가 없어지지 않고
다만 더 훌륭한 문장으로 가꾸어질 뿐이다.

모든 문장들이 훌륭히 다듬어져야 하므로
하느님은 여러 감수자들을 두셨다.

오래되거나 좋지 않아서 바뀌는 문장도 있고
전쟁이나 법 때문에 바뀌는 문장들도 있었다.

하느님이 흩어져 있는 책장들을 거두시니
모든 책이 그 분의 서재로 모이게 될 것이다.
 
<84번가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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