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톤 핑크>를 보고, 실패의 여정으로 폭로되는 LA 영화 산업의 현실에 대해 적어보려고 합니다. 전체적인 줄거리가 포함되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바톤 핑크는 감독에게서 실패자, 낙오자, 밀고자 따위로 번역되는 이름을 받았습니다.(참고) 감독은 핑크의 실패를 이름에서부터 암시하고, 핑크가 처음 할리우드로 떠나는 장면부터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그의 여정이 실패할 것임을 관객에게 명확히 알립니다. 그렇다면 감독은 실패자 핑크가 관객에게 무엇을 밀고하게 하려 했던 것일까요. 핑크가 실패하는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할리우드 영화 제작 시스템의 현실과 그 속에서 작가로서의 주체성과 작품성이 어떻게 상실되어 가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을 위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쓰고 싶어 했던 핑크는 한 번의 큰 성공으로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습니다. 생계를 위해 고귀한 신념을 포기하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이러니하게도 소위 성공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게 된 핑크. 그에게도 드디어 성공의 기회가 찾아왔다며 매니저는 핑크에게 할리우드에 가서 영화를 쓰자고 설득합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극을 만들겠다며 반발하는 핑크에게 매니저는 ‘할리우드로 옮겨간 보통 사람들이 한 두 명쯤 있겠죠.’ 라며 농담을 던지지만, 핑크는 그건 합리화일 뿐이라고 돌연 화를 내죠. 매니저가 말한 바로 그 ‘할리우드로 옮겨간 보통 사람’이 자신이 될 것임을 스스로는 알고 있기에 핑크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보통의 꿈을 꾸는 사람들처럼 LA에 입성한 핑크. 핑크는 호텔 방에 걸려 있는 해변을 바라보는 여인의 사진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합니다. 어쩌면 핑크는 그 여인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릅니다. 지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여인처럼, 핑크에게도 지금은 자신이 바라보는 곳에 진정으로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신념까지 버려가며 들어가려는 순간이었으니까요. 끝도 없이 펼쳐진, 아름답지만 실체를 알 수 없는 곳을 바라보는 여인에게서 보이는 자신의 모습, 꿈을 꾸며 먼 곳을 바라보는 ‘보통 사람‘의 모습에 핑크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핑크에게 작가로서의 신념은 할리우드 B급 오락 영화가 아닌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연극을 쓰는 것이었으니 말이죠. 핑크는 자신이 의뢰받은 B급 레슬링 영화의 대본을 좀처럼 써내려가지 못합니다. 호텔 직원의 질문으로 대변되는 생소한 언어(trans or res?), 자신이 알던 인간적인 보통 사람들이 아닌 엘리베이터 도어맨과 같은 기계적인 사람들, 고용주와 피고용인 간의 수직적 위계질서 등 LA의 새로운 환경에도 도무지 적응할 수가 없을 것만 같은데, 오로지 상업적 목적의 레슬링 영화를 써오라는 사장의 요구에 핑크는 어지럽기만 합니다. 방황하던 핑크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품의 물꼬를 트려 노력하지만, 오히려 그 과정에서 아름답게만 보이던 LA의 실체를 하나씩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 실체에는 작품성 따위에는 관심도 없으며 돈만을 위해 일하는 제작사, 인간적인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일하는 사람들, 대필 작가를 두고 있는 알코올 중독 유명 작가, LA의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른 여성의 모습이 포함됩니다.
핑크는 자신의 성공한 연극을 통해서도 말했습니다. 눈을 뜨고, 해가 떠오르면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고. LA로 이사 온 첫날, 해변을 바라보는 여인의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잠든 핑크가 눈을 떠서 처음으로 본 것은 천장의 벗겨진 벽지와 벽지가 벗겨진 곳에 보이는 빨간색의 벽, 그리고 그 주변에 군데군데 묻은 정체 모를 빨간 자국이었습니다. 해지고 찢어진 벽지 안쪽으로 드러난 불길한 적색 벽은 핑크가 경험한 LA의 실체를 은유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쓰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대본에 하루하루 지쳐가던 핑크는 옆 방의 투숙객 찰리(킬러 문트)를 만나게 됩니다. 핑크는 찰리가 바로 자신이 보고 싶어했던 보통 사람이고, 자신의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하며 그와 시간을 보내며 위안을 찾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될 위험에 처한 핑크는 충격에 빠져 주체성을 잃은 채 찰리에게 의존하여 삶을 지속하기 시작합니다. 찰리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나 의심 따위는 전혀 없습니다. 사람은 위기에 처할 때 능력을 발휘한다고 했던가요. 뒤이어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일련의 사건에 자극을 받아 핑크는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단, 핑크는 살인, 의문의 상자 등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과 소재에 대해 일말의 질문이나 비판적 사고 없이 그저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며 창작에 몰두합니다. 이런 핑크의 모습을 보면, 찰리는 핑크가 만들어낸 상상 속 존재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할리우드에 왔지만 보통 사람의 이야기밖에 쓸 수 없는 작가인 핑가, 어떻게든 글을 쓰기 위해 LA에는 없는 보통 사람을 만들어내고는, 글을 쓸 수 없게 되어버린 작가 핑크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주도권을 주인공 찰리에게 양도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완성된 핑크의 작품이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할 것은 자명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의뢰받은 소재와는 전혀 다르게 보통 사람 '찰리'를 소재로 글을 써냈으니까요.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웃음을 유발하는 B급 레슬링 영화가 아닌, 평범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를 제작사 대표가 작품으로 제작할 리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핑크는 처음부터 그 결과를 알고 있었습니다. 매니저에게 작가로서의 신념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할리우드로의 이적을 망설였으니까요. 부와 명예를 좇아 빛나 보이는 곳으로 왔으나, 정작 그가 찾은 것은 LA의 현실과 망상 속 보통 사람(찰리)였습니다. 또한, 할리우드에서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에 그치지 않습니다. 핑크는 자신이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권리, 그리고 가족을 전부 잃습니다. 성공하지 못하면 자신이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커녕 그 모두를, 그 이상의 것을 잃을 수 있는 할리우드 시스템의 힘과 불공정성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모든 것을 잃은 핑크는 작품의 영감이었던 정체 모를 상자를 들고 해변으로 향합니다. 그에게 사진 속 여인이 다가와서는 상자에 뭐가 들었는지, 그 상자가 핑크의 것인지를 묻습니다. 핑크는 그 상자로 자신의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작가라면 모름지기 자신이 다루는 작품의 소재와 주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설명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는 여인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합니다. 즉, 핑크는 주체적으로 그 작품을 만들어낸 게 아니었고, 그렇기에 자신의 작품에 대해 묻는 여인의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상상 속 존재였던 찰리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어떠한 비판적 사고와 주관도 없이 그 주인공에게 끌려다닌 채 만들어낸 작품이었으니, 핑크가 상자에 대해 설명할 수가 있었을까요. 적어도 핑크가 진정한 작가였다면, 주인공이 자신에게 던진 상자가 무엇인지,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확인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 핑크의 변화는 비단 그가 나약하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감독 코엔 형제가 작가의 주체성이 할리우드에서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리고 할리우드가 그런 작가의 주체성을 어떻게 상실시키는지를 주인공 핑크의 할리우드 체험기를 통해 관객에게 폭로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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